포천예총 임승오 회장님 인터뷰 ㅣ늘 그 자리를 지켜주는 고향의 자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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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소개 한번 부탁드립니다!
저는 포천 예총 회장으로 이제 5년 차 되는 임승오입니다. 현재는 고향 포천에서 조각 작품 활동도 하고, 또 고향을 위해서 이렇게 예총 회장으로서 봉사도 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했는데, 이제 대학까지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으로 가게 되면서 거기서 조각 전공을 했어요. 그 다음엔 중고등학교 교사로 한 3~4년 일 했고, 그 후에 다시 공부를 하고자 스페인 유학을 가서 스페인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석박사를 하고 돌아왔죠. 그래서 지금은 없어졌지만(웃음) 경기도 장흥의 토탈미술관에서 학회실장으로도 한 7년 정도 있었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유학파이며 예총 회장이기 이전에 조각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해오신 임승오 회장님. 고향인 포천의 예총 회장을 맡기 전엔 교편도 잡았고, 당시로선 이르지 않은 나이에 스페인 유학길에도 올랐으니 참으로 남 다른 사연이 있는 듯 싶었다.그 중에서도 일단, 특히 스페인 유학 시절 이야기가 궁금했다.
-스페인 유학 시절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91년도, 그러니까 제가 35살 됐을 때 유학을 갔으니 좀 나이 든 학생으로 유학을 간 셈이죠.(웃음)
그런데 이제 처음에는 바르셀로나가 다른 곳 보다는 그나마 인종차별이 심하진 않았어도,
그냥 조그마한 동양인이 와서 작업을 하니 아무래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어요.
좀 꺼려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제가 작업을 몇 달 해서 보여줬더니,
"너는 이미 다 마스터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여기 왔냐?"
하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는 너희 문화를 배우러 왔다."
제가 안토니 가우디를 좋아해서 일부러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간 거였거든요.
임승오 회장님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가우디를 소개한 이력이 있을 정도로 가우디는 물론, 스페인 건축과 문화에도 관심이 매우 깊다. 그 결과 경기도 광주에 20만평 규모의 스페인 조각공원을 조성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고 한다. 스페인 유학시절엔 참으로 얼떨떨(??)한 경험을 해보기도 했을 정도로 임승오 회장님과 스페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스페인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면서 지도 교수님이 갤러리를 소개해주셔서
현지에서 전시도 하게 됐었어요. 바르셀로나 중심가에서 했는데,
처음에는 갤러리 주인이 별로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제가 디스플레이를 다 끝내고나니
갑자기 절 관심있게 보더라고요. 그러더니 다음 날 제 전시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한테 잘 보여야 된다"
하더니 그 사람하고 한참 동안 제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설명도 하더라고요.
그랬더니 그 다음 날
일간지에서 제 전시 작품에 별 4개를 달아줬습니다
.
별 5개가 만점인데, 이제 5개는 피카소나 달리 정도의 화가에게 달아주는 거고,
제가 4개를 받았다는 건 최고 대우를 받게 됐다는 거였어요.
그러자 갤러리 주인이 그때부터 작품을 팔라고 그러더니, 다섯 점을 팔더라고요.
저는 작품을 팔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그냥 유학 마무리 차원에서 전시를 한 건데,
넌 여기서 작품을 해도 되고, 거주를 해도 된다. 라는 말을 들으니 얼떨떨 했죠.
그러나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스페인에서의 유학 생활을 뒤로 하고 귀국하게 된 임승오 회장님. 아직도 가끔씩은 그때 그냥 스페인에 머물렀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그 만큼 스페인 유학 생활은 임승오 회장님 일생에 기억에 남는 특별한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그냥 시골이죠. 공장 같은 건 거의 없었고요. 그냥 씨족 사회에 마을 단위로 있었죠.
지금은 도로도 많이 넓어지기도 했고 아파트도 생기고, 공장도 많이 들어서다 보니까
옛날 모습은 이제 뭐 여러 군데 없죠.
-포천 출신이자, 예총 회장님으로서 느끼는 현재 포천만의 지역적 특색은 무엇인가요?
조각을 하면 재료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이태리 같은 데는 대리석이 많으니까 대리석 조각이 많듯이,포천은 포천석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요. 돌로 된 조형물로 된 돌이 재료로 된 조형물의 80%가 포천석입니다. 포천석이 그런 조각 재료뿐만이 아니라 건축 재료로도세종문화회관이나 또는 국립현대미술관이나이런 건축 재료들도 다 포천석이 가장 많이 쓰여요. 조각 재료로도 굉장히 좋은 환경을 갖고 있기도 하고,작가들이 작업하기에는 좋은 위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포천석에 대한 자부심 만큼이나, 임승오 회장님은 스페인에서 넓혀온 본인의 조각 세계를 포천에서도 부단히 구현 중에 있다. 포천 산정호수의 조각공원에서 임승오 회장님의 예술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임승오 회장님은 폐석산을 활용하여 새로운 문화 복합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포천의 얼굴로 떠오른 포천아트밸리의 전체 컨셉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포천의 문화 발전에 힘을 보탰다.
-그럼 지난 5년 동안 포천 예총회장님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예총에 소속된 8개 협회가 힘을 모아 펼친 2019년 포천 거리아트 페스티벌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펼쳐진 예술제였는데, 포천의 독립운동가들도 조명한 것도 뜻 깊었고,
8개 협회가 다 함께 모여 콜라보를 진행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임승오 회장은 조각에 국한되지 않고, 포천 예총회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고향 포천과 포천 지역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도 드러냈다. 오성과 한음을 익히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을 필두로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인 의병장 최익현, 조선시대 3대 문장가 양사언 등, 포천의 얼을 드높인 많은 인재들에 대한 언급을 하며 이러한 포천의 역사성이 문화 관광과 연결되면 좋겠다는 바람 또한 나타냈다. 포천 예총회장으로서 문화 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과 통찰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임승오 회장님은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포천 예술인들의 복지와 권익에 대한 관심과 고민도 내비쳤다. 그러나 결국 예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고, 이 점은 다수의 인터뷰이들도 토로한 지점이라 더욱 엄중하게 다가왔다.
-조각가로서, 조각이 지니는 조각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제 작품이 산정호수 조각공원에도 있고, 포천아트밸리에도 한 5m 이상 되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야외에 그런 큰 조각품을 세워서 대중들하고 같이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뽑을 수 있겠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가지 않아도 야외에서 자연과 어우러져서 작품이 하나의 자연이 되어 그곳을 찾는 사람들하고 같이 이렇게 어울려질 수 있는 그런 게 다른 예술하고는 좀 다르니까요. 포천은 자연 경관이 몹시 아름다우니까 (조각은) 포천과 정말 잘 맞는 예술 장르 같다는 생각을 저 개인적으로도 하고요.
-끝으로 포천문화재단에게 해주고 싶은 한 말씀도 부탁합니다!
포천문화재단(의 설립)이 그래도 다른 지자제보다는 포천이 좀 앞서가는 것 같아요. 포천의 인구가 15만인데 한 30만 정도 이상은 돼야 문화재단이 생기더라고요. 다른 타 지역 보니까 뭐 아직 30만이 넘어도 안 생긴 곳이 많아요. 경기 북부에서 그래도 선두적인 역할을 하면서 포천에 먼저 문화재단이 생긴 것은 굉장히 저로서도 반갑고 환영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포천에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제가 포천에 와서 이제 한 15년 이상을 이렇게 있고, 게다가 포천이 제 고향이다 보니 구석구석 다 알게 되죠. 인물이라든지 문화재라든지 많이 있는데 할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런 인물들을 많이 이제 조명하는 작업을 비롯해서 포천의 문화의 우수성을 좀 많이 알리고, 포천에 지금 거주하면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권익을 많이 보호해주는 그러한 역할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조각가의 꿈을 키우며 스페인 바르셀로나 유학을 갔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포천예총 임승오 회장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쩌면 문화 예술이란 늘 그 자리를 지키며 떠나버린 무언가를 원래 있어야 할 제자리로 되돌려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향의 자연처럼. 그리고 그 자연과 어울려 또하나의 새로운 자연이 된 조각처럼, 그렇게 말이다. 그럼 임승오 포천예총 회장님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포천문화재단 웹진 <하이픈>이 될 것을 다짐하며,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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