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소리꾼 이계순 님 인터뷰 ㅣ 욕심내지 말고 가는 길을 포기하지 말고 한 발자국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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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터뷰는 포천에서 태어나 우리 소리를 익히고 배워 지금은 서울에 삶의 터전을 잡고 활동하는 소리꾼 이계순 님이다. 여성국극에서 특히 두각을 보이고 있는 이계순 님을 만나 고향 포천과 소리꾼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이계순 님의 서울 자택에 방문했다. 따듯하게 반겨주는 소녀 같은 모습에 인터뷰가 몹시 기대됐다.
-자기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국극을 하고 있는 이계순이고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포천 창수면이라는 산골에서 태어나 살았어요. 전기가 4살 때 들어왔고 마을에 다리도 없었어요. 문화라는 걸 전혀 모를 때였는데 저희 시골에는 상여 소리 아시죠? 누가 돌아가시면 상여 소리를 하고누가 아프면 병원이 없으니까 굿을 했어요. 꼬마 때부터 우리는 놀고 자란 게 냄비 뚜껑 두들기고 논 게 '덩덩덩덩쿵'이거든요. 모든 국악의 기초가 이 무악에서 시작됐어요. 저는 전문적으로 뭐 이렇게 일찍부터 뭐 판소리를 배우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보고 자란 게 바로 그런 것들이었어요. 동네에서 들을 수 있는 상여소리라든지 굿을 하는 소리를 다 외우면서 놀고 그랬거든요.
좀 더 우리 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예고로 진학하며 서울로 오게 된 이계순 님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위대한 스승님들을 만나 점점 더 우리소리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여성국극을 만나게 된다. 여성국극은 1948년 여성 소리꾼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여성국악동호회’에 의해 여성만 출연한 일종의 창극으로 시작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민족 음악극의 하나이다. 지금도 여성국극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계순님 또한 여성국극에 몸 담으며 정진에 정진을 계속하는 중이라고 한다.
힘들기 때문에 요즘 소리 하는 친구들은 여성국극을 잘 안 하려고 해요. 너무 힘들잖아요. 내가 굳이 힘들게 이걸 왜 해, 생계가 유지가 안 되는데, 국립이나 시립이라고 이런 데는 그래도 안정적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어가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요. 저 같은 경우는 여성국극을 하고 창극을 하고 같이 하거든요. 창극은 남녀 혼합이고, 여성 국극은 여자들만 하는 건데, 여성국극에 또 매력이 있고 창극은 창극만의 매력이 있는데, 저는 이 여성국극이 지금보다 더 상품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여성이 남자 배역까지 맡는다는 그 형식 자체에서 보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남자 배우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연기와 발성. 그리고 표현방식은 흔히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극은, 춘향전 예를 들면은 남자가 방자도 맡고, 변사또도 당연히 남자가 맡아요. 근데 여성 국국은 뭐냐. 여자가 남자하고 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금방 할 수 있게 아니에요. 이게 너무 여성스러운 사람은 안 되고, 너무 어깨가 작은 사람은 어깨에 뽕을 넣어서 남자처럼 보이게 해야 돼요. 분장 자체도 여자와 남자는 완전히 달라요. 연기도 받쳐줘야 돼요. 남자 역을 하는데 목소리 여자 목이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만만큼 단련을 해야 돼요. 단련이 안 되면, 아 저게 뭐야, 딱 봐도 여자네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
이런 여성국극만의 특수성 때문에 여성국극을 하는 이가 점차 줄고 있고, 지금 하고 있는 분들도 고령화에 접어 들고 있는 점이 참 아쉽다고 말하는 이계순 님. 고향 포천에서 여성국극의 문화 상품화를 꿈꿔본 적도 있다고 한다.
저희 고향 포천에도 문화 상품으로 하면 어떨까 해서 20대 때, 포천시에서 예술 발전에 많이 도움을 주신 분이 계셨거든요. 아버님 친구분이신 고 강수동 회장님이신데, 제가 한 번 찾아 갔었어요. 여성국극을 저희 고향에서 한번 제가 하고 싶은데 여성국극 극장 하나 만들어주십시오 그랬어요. 기업인들이 후원을 해주면 나는 무조건 그렇게 되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무턱대고 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땐 몰랐어요. (웃음) 그때 회장님이 많이 몸이 안 좋으실 때였어요. 국국은 내가 잘 모르고, 그거는 좀 어렵고 그냥 내가 너 하나 그냥 도와주마 하셨는데 제가, 저는 괜찮습니다. 저 여성국극만 말씀드린 거였어요, 라고 했거든요.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좀 많이 아쉬워요. 제가 더 적극적으로 해볼걸.
-고향 포천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어떤 게 남아 있으신가요?
제가 어렸을 적 모내기를 할 때는, 지금은 기계로 하지만 그땐 손으로 모내기를 했어요. 어린 제가 어르신들 틈에 껴서 일손을 돕곤 했었는데, 하다 보니까 너무 심심한 거야. 그래서 제가 민요 할게요, 그러면서 제가 막 민요를 불렀어요. 모 심으면서 꼬마 때부터 그렇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옆에 있던 우리 아버님이 생각이 나서 그렇게 자란 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아버님은 또 흥이 되게 많으셨어요. 우리 아버님이 끼가 많으셔가지고 제가 그걸 물려받아 사람들 앞에 나가서 웅변 같은 것도 했어요. 남들 앞에서 연기도 했고. 아버님의 끼를 받은 거예요. 남의 앞에서는 떨리는 게 없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얌전하게 있다가도 동네 어르신들과 한 잔 하시면 등에다가 바가지를 집어넣으셔가지고 춤을 치시는 거예요. 저는 그걸 못 잊어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이계순 님은 지금은 포천이라고 하면 바로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떠오르게 되는지 말씀 도중 눈물도 머금으셨다. 그 애틋한 감정과 고향 포천, 그리고 자신이 일생 절차탁마 하고 있는 소리에 대한 집념은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이계순 님의 예술 세계를 넓혀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계순 님은 고향 포천에서 그 어떤 외국 공연보다 깊은 교훈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공연도 해본 기억도 있었다고 한다.
저는 항상 공연 장소를 되게 중요시 하거든요. 근데 고향 포천에서 수녀님들께서 운영하시는 암 환자분들을 위한 시설이 있어여.
(정식 무대는 아니고) 시한부이신 분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된 거였는데, 공연을 마치고 나니 다들 침대에 누워서 박수를 쳐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고 제가 정말 공연 중에서 고향에서 이렇게... 어디 외국 공연도 갔었지만 이렇게 정말 뜻깊은 공연은 정말 없다고 느꼈어요. 그 분들 보고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저도 공연이라고 하면, 대극장, 이런 것만 생각하고 그랬었어요. 대극장이나 무슨 극장 이런 것만 중요시했지 제대로 무대가 조성되지 않은 곳에선 공연을 무조건 하진 않았거든요. 근데 그렇게 침대에 누워계신 분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너무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저는 외국 공연 이런 거보다 대극장보다도 가장 멋진 공연이었고 가장 훌륭한 공연이었다라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뭐든지 건강해야 할 수 있어요. 사실 저는 제 목소리가 원래 제 목소리가 아니에요. 목병이 났어요. 우리 아버님이 교통사고라기보다는 좀 안 좋게 돌아가셨어요. 덤프트럭이랄까. 본 사람이 없으니까... 오토바이로 친구 병문안 다녀오시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그게 바로 개천이었어요. 그렇게 슬프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가 한겨울에도 난방을 안 켰었어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님이 그렇게 가셨는데 나는 뜨거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면서 제가 얻은 게 목병이에요. 제 목소리가 사실은 이 판소리 하기에는 목병 나고부터 더 힘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많이 울었어요. 이 목소리 때문에 이거 너무 힘들다..
그것은 분명 안타까운 개인사였다. 슬픈 이야기였다. 그러나 예술에는 한을 흥으로, 비극을 희극으로 역전시키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을 절로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근데 저는 이 목소리가 제 캐릭터가 된 거예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 나만의 목소리 그래서 물론 목소리 때문에 판소리를 이렇게 힘 있게 못하고 몸이 안 좋아서 못하지만 나만의 캐릭터를 내가 만들었다. 단점을 내가 승화시켰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내 목소리 흉내 못 내니까 이렇게 자부심을 개인적으로 가져요. 한때는 막 자책을 했어요. 근데 내 스스로 계속 자책 속에 살았는데 그렇지만 이제 그렇게 할 필요는 없고 내가 내 이제 수긍을 해야 되니까. 근데 그냥 내려놓자. 내려놓고 그냥 편하게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곳까지만, 너무 위로 보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아래를 보지 말고 딱 요만큼만. 욕심내지 말고 가는 길을 포기하지 말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나가자. 이런 마음으로 다시 다 잡았어요.
-너무 감명 깊은 이야기들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끝으로 포천문화재단에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아이고, 이게 제일 어려운 질문이에요. 문화재단이 생긴 건 너무 축하할 일이에요. 정말 정말 너무 많이요. 왜냐하면 그 문화재단 생긴 거는 이제 여러 음악을 많이 접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 포천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고. 근데 저는 문화재단이 생겼다고 해서 꼭 좋아하기 만한 일은 아닌 거 같아요. 더 걱정도 생겨요.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루두루 같이 가야 된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문화재단이 생기면서 더 많은 문화가 융합이 좀 됐으면 좋겠어요. 따로따로가 아닌, 음악도 국악과 서양 음악이 어울리기도 하고. 한길로 같이 가는 예술이잖아요. 그래서 항상 고향은 여기 살고 있지만 항상 고향은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이계순 님이 인터뷰 중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내려놓고 그냥 편하게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곳까지만, 너무 위로 보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아래를 보지 말고 딱 요만큼만. 욕심내지 말고 가는 길을 포기하지 말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나가자. 이런 마음으로 다시 다 잡았어요. 욕심내지 말고, 가는 길을 포기하지 말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이 말처럼 계속 정진해나갈 이계순 님의 예술 세계에 많은 기대가 되었다. 포천문화재단이 항상 이계순 님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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