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이발관 이응수 대표님 인터뷰 ㅣ 포천 자연을 지키는 게 포천 사람을 지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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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넘치고 멋도 넘치는 평화이발관 이응수 대표님은, 고향 포천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 꽤나 많은 시간을 보태오셨다고 한다. 자연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이응수 대표님의 삶과 생각에 대해 더욱 궁금해져 찾아간 곳은 무려 38선 위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알아갈수록 더 궁금해지는 대표님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졌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일단 제가 포천에 오게 된 건, 양문이 54년도 11월 15일날 수복이 됐어요. 그래서 저희 아버님이 이북에 계셨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온다는 게 영중면으로 오게 됐고, 영중면 양문리 팔사 구본지가 저희 주소가 됐어요. 이곳이 제 2의 고향이 된 거지. 여기 이 영중면에서68년이나 산 거예요. 그렇게 한 번도 포천을 안 떠나고 68년을 살면서 79년도부터 사회 생활을 했어요. 그 당시에 여기 의영 소방대 총무부장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육성회 총무, 중학교 총무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 그런 일들을 다 거쳐오게 됐는데, 이제 봉사 생활을 하면서 군대는 안 갔기 때문에 사회에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봉사를 한 거예요.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자연보호 봉사, 새마을지도자, 자연보호협의회 회장들을 다 제가 역임을 했어요. 그리고 포천시 자연보호협의회장을 2018년도에 4년을 하고 그만둔 상태인데 지금은 이제 이 동네에 이제 영중면 환경지킴이를 끌고 가고 있어요. 원래 환경에 대해서 관심이 좀 많았었고, 그래서 산림청 환경엔지오, 산림 환경청 산림엔지오 그런 엔지오들을 다 거치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돌산의 점검을 나가고 있어요. 그뿐만이 제가 포천 뉴스에도 시민기자로 연결이 돼 있어서, 자료를 만들어서 맨날 공개를 하는 그런 활동을 하고 있어요.
대표님의 자기 소개의 절반 넘는 내용이 환경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에도 내내 과거 포천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얼마나 맑은 곳이었는지, 마치 지금도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말씀을 늘어 놓으셨기에, 대체 어떠한 연유로 이렇게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다.
-환경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려서부터 환경에 좀 관심이 많았어요. 원래 여기 포천 지역이 굉장히 깨끗했었어요. 냇가 물이 얼마나 맑았냐 하면, 제가 전에는 시내에서 종업원 셋을 데리고 일을 했는데 그때는 저녁에 일이 끝나면 겨울에 가서 투망을 한 번 치면 고기를 잡아서 그걸 끓여 매운탕을 매일 저녁을 날 끓여 먹었는데, 그 물을 그냥 떠서 끓여 먹을 정도로 깨끗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물이 나빠지기 시작한 게 가산에 그 공단이 막 들어오면서 공장도 들어오고 그때는 그 양문공단하고 신평공단이 없을 때니까 가산에 무허가 공장들이 그냥 막 난류를 하면서 포천천 물이 굉장히 나빠졌죠. 포천천 물이 지금은 5급수가 돼서 포천천 물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내가 2006년도 8월 3일에 냇가에서 사람이 하나가 익사 사고가 나서 익사 사고 난 사람을 건져주고 삼일 동안 물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건졌어요. 그런데 그 후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발 양쪽에 수포가 생겼었어요. 그러다가 며칠 후에 전신 마비가 왔었어요. 그래서 의정부 성모병원에 두 달 동안 입원하면서 이제 그걸 이제 회복을 하는데 만 3년이 걸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환경에 더 깊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지금까지도 환경 엔지오를 하고 있어요.
포천에서 지내 온 세월만큼, 이응수 대표님이 포천의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꽤나 구체적이고, 인상 깊었다.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만큼 다양한 활동을 해오신 대표님은, 그 활동들을 이어오면서 포천의 역사 문화 유적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여주셨다.
-포천 역사 문화 유적에도 관심이 크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유적들에 관심을 쏟고 계신가요?
인용군 묘 앞에 석조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게 많이 없어졌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거기로 소풍을 가면 석조물들이 많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요새 가보면 석조물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게 왜 없어졌는지, 누가 가져다 팔아 버린 건기,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전부 다시 찾아서 복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에 한글로 만든 최초의 그 비석이 있어요. 여기 영중면에 그 비석이 있는데, 지금 그게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어요. 그 석조물이 옛날엔 밭 가운데 하나 있었는데 그 양쪽 밭들이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라, 다 어떻게 팔리고 해버려서 지금은 양쪽에 흙이 쌓이고 그 비석은 반은 흙 속에 들어가있는 상태가 돼 버렸어요. 그런 것들을 우리 포천문화재단에서 좀 빨리 복원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문화 유적에 관심을 가진다거나, 깊은 감흥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표님과 같이 문화 유적을 마치 자신의 집처럼 여기며, 훼손되는 것에 진심으로 슬픔과 심각성을 느껴 행동에 나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대표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장소여서인지, '평화이발관' 또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발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 평화이발관은 어떤 곳인가요?
이건 제가 2006년도에 혼자 손으로 진 집이에요. 전에 저 쪽 사격장 안에 불이 나서 나무가 많이 죽어 있었어요. 이거를 일 년 동안 가공을 해서 모아놨다가 두 달 만에 조립을 한 거예요. 그리고 여기가 바로 gps 삼팔선이 딱 찍히는 자리고, 이 땅을 살 때도 '아 내가 여기다 집을 짓고 살아야겠다.' 생각을 하고 땅을 산 땅이에요. 요 밑에 가면 옛날 구길에 6.25 때 쓰던 호가 있었어요. 여기 이곳 858-1 번지가 그 호 자리에요. 그리고 바로 나가면 옆에 조그마한 산이 있어요. 그게 여방골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 거기에 아기들이 죽으면 묻어두는 애청이 많이 있었어요. 산소도 하나 없이.
이 이야기를 해주시는 대표님은 미소를 머금고 계셨지만, 이따금씩 조금 슬픈 표정을 비추셨다. 동족상잔의 아픔이 그대로 묻어있는 이곳에서 대표님은 분명 문득문득 떠오르는 슬픔과 마주하셔야 했을 텐데,굳이 이 자리에 이발관을 짓게 되신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이 자리에 이발관을 지으신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통일되면 누구보다 가장 빨리 가려고 그렇죠. 저희 아버님 고향이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이거든요. 제가 아직도 거길 다 기억하고 그곳에 대한 책자도 갖고 있어요. 이북 5도민들이 만들어 온 책자인데, 거기에 주소가 다 기록돼 있어요. 그래서 통일되면 먼저 진짜 그날로 차 끌고 올라가서 꼭 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38선 위에 이발소를 짓게 되셨다는 대표님의 말씀과 마음이 크게 와 닿았다. 이 평화이발관은 대표님에게 있어 단순한 직장의 의미를 넘어, 제 2의 고향 포천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 준 베이스 캠프이자 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품게 해 준 둥지가 되어준 것이리라. 자세한 이야기를 다 듣고 '평화이발관'이라는 단어를 소리내어 곱씹어 보니 이전에 흔하게 듣고, 쓰던 것인데도 '평화'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발관에 '평화'라는 단어를 넣으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남북한 그 관계를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해요. 이쪽 사람들이 나쁜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던 일이 있어요. 탄약고가 여기에 있는데, 그냥 바깥에다가 그냥 야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냥 나쁜 짓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근데 이 지역 사람들이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북에서 넘어왔을 때는, 이북에서 인민군이 오면 여기 아군들한테 저 사람이 뭐 공무원 가족이다,운동권 사람이다, 하면 그 가족들까지 잡아다 죽이고, 또 후퇴를 해서 넘어가면 저 놈이 고발한 놈이야, 그러면 그 놈을 잡아다가 죽이고 막 그런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이쪽 사람들이 굉장히 반공 정신이 투철해요. 그리고 여기 금주리에 가면 일사 후퇴 때 후퇴를 하고 남은 인민군들이 모여서 살고 있던 산이 있어요. 그곳에 있는 바위 이름이 행상바위인데, 그 바위에 가면 우리 아군이 일개 사단 정도가 전멸을 했다고 하는 지역이 있어요. 금주 초등학교에서 학도병들을 훈련을 시켜서 올려보내면 저녁이면 하나도 못 내려왔대. 그러면 그 민간인들이 가서 옷을 벗겨다 신고 신발을 벗겨다 신었다는 거야. 그런 지역이 여기 그 금주에 가면 있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2000년도 6월 25일날 내가 비석을 세워뒀어요. 한 50cm짜리 비석을 두께는 15cm 넓이가 30cm 길이가 50cm 비석을 만들어서, 그걸 지고 올라가서 세운 건데, 지금은 해마다 6월 25일에 거기서 제사를 지내곤 해요.
포천 지역에 남아있는 과거 남북 관계의 슬픔과, 그 슬픔의 흔적이 치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 이발관'이라는 이름을 지으셨다는
대표님. 대표님의 마음에 남아 있을 흔적들도 '평화'라는 단어가 함께 치유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역사와 자연을 사랑해 마지 않는 대표님이 기억하는 포천의 과거와 현재를 듣고 있자니, 그가 그리는 포천의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일지, 묻고 싶어졌다.
-대표님이 바라는 포천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좀 더 투자를 해서 포천의 공해가 맑아졌으면 좋겠어요. 그게 맑아져야 우리가 포천이 외지에서 와서 '진짜 살기 좋은데?' 이러지. 그리고 지금 우리 포천 영중면 지역에도 저 큰 산들이 다 굴이에요. 저기 부천도 무슨 굴 무슨 굴 만들었대요. 광명시에도 광명굴 만들었죠. 그 광명굴보다 더 좋은 데가 여기 이 안에 그렇게 많이 있어요. 지금 금주리에서부터 이 일대 전체가 다 땅속으로 다 굴이 되는 거예요. 여기가 금광일 때 여기서 금을 캐느라고 이곳 전체가 다 금강 줄기예요. 그 금광이 그 금광을 입구만 좀 다 뚫어내면 다 그냥 굴이 있어요. 거기가 너무 시원해서 그 앞에 가면 그 1분을 못 앉아 있어요. 한참 더운 여름 복날에도 겨울 점퍼를 입고 가서 있어야 돼요. 전에 거기를 얼음굴이라고 했는데, 그게 금강굴에서 나오는 찬 공기에요. 얼음이 진짜 있어. 여름에 가도 얼음이 있어요. 그런 곳을 앞으로 포천시가 좀 활용을 하고, 개발을 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포천에서의 68년 세월을 증명하듯, 대표님께서는 장차 포천의 주요 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잠재력이 충분한 곳들을 정말 많이 알고 계셨다. 대표님께서 말씀해주신 금광굴이 정말로 관광지로 개발된다면, '평화굴'이라 이름 붙이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보며
글자 그대로 포천의 산증인이신 대표님에게 가장 애정하는 공간이 어디인지 소개를 부탁 드렸다.
-아쉬운 점, 그리고 바라는 점들을 담아서 포천문화재단에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이 영중면이 포천의 중앙이고 남북한, 경기의 중앙이라 그래요. 영중면, 그리고 포천이 그런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까 , 아직 잠들어있는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발굴해서 우리 포천이 관광지로 진짜 좋아지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이발관 이응수 대표님께서는 포천 자연을 지키고, 아직 주목 받고 있지 못한 수많은 포천의 자원들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발굴해내야만 더 나음 포천의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해주셨다. 그냥 한 번 눈길을 주고 지나칠 수도 있는 흙 하나, 돌 하나도 포천의 잠재력이라 여기며 윤이 나게 돌보고 계시는 대표님. 포천문화재단 웹진 <하이픈> 역시 '포천의 자연과 문화를 지키는 것이 곧 포천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던 대표님의 말씀을 마음 깊숙이 넣고 포천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 뜻깊은 시간이었다. 대표님의 작은 노력들이 언젠가 포천의 달처럼 밝게 빛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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